[2000.11.29]제6회 비닥 디자이너 포럼-현태준론 화일
어제 11월 28일 열린
제6회 비닥 디자이너 포럼 유인물입니다.
행사 소식도 곧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무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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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준론
유토피아/디스토피아 혹은 위선/위악
1) 성(聖)의 영역에서 속(俗)의 영역으로.
2) 과도한 타율대상에서 점차 증대하는 자율의 경향.
3) 세계관이 그 인식적 실재를 방기하고 (우주론이 순수한 도덕체계로) 변화되는 경향.
4) 부족(部族) 특수주의에서 보편주의적인, 그리고 개인주의적으로 전환.
[하버마스]
매월 18일은 바람 피는 날.
[현태준]
탈현대는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이미 파괴된 것의 잔재/흔적을 갖고 노는 게임이다. 역사가 멈춰졌기 때문에,
일종의 의미 없는 탈역사 속에 우리는 존재한다. 누구도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부유해야만 한다. 마치 중력의 원 속에 있듯이. 우리는 더 이상 진보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불행만은
아니다.
[보드리야르]
대낮에 키쓰하여 밝은 사회 이룩하자.
[현태준]
1. (지겹게) 들어가는 글
한 작가에 글을 쓴다는 일은(직업이 아니라면)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거기다가 최근의 쟁점과 글 쓰는 사람의
관심분야가 겹쳐지면 흥분되기 시작한다. 신경은 팽팽해진다. 현태준 잘 만났다. 知的 먹이.
우선 현태준의 작품을 삐딱한 눈으로 본다. 생각보다 쉽게 일람표가 나온다. 글의 '와꾸'가 잡힌다. 진지한 예술
혹은 현대디자인과 현태준 작품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 금욕적/쾌락적, 문자중심적/복합감각적, 내성적/외향적,
은폐적/노출적, 축적적/소비적, 미래강박적/현실찰라적, 일원론적/다원적, 위세중심적/호혜적...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태준을 일탈과 저항으로 풀면 이 글의 게임은 끝이다. 아니면 흘러간 이야기지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풀어?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로 진지하게 접근해봐? 80년대와 90년대의 변증...? 다시 현태준의
작품을 본다. "맨날 제육볶음만 어떻게 먹냐. 조까" 이거 예술이다(!).
그렇다. '현태준은 예술이다' 물론 이 말은 '이박사는 예술이다'라는 말과 다르다. 요즘 '예술'이라는 단어가 비아냥,
조롱, 시비 걸기 등을 위해 적잖이 활용되기는 하지만 나는 적어도 언어폭력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진지함과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디서나 유효하다.
그러나 '현태준이 예술이다'라는 역사적 근거는 대단히 상대적이며 협소한 발상이다. 이 표현의 진의는 '예술과
디자인'이라는 근대적인 틀에서 유추된 것이다. 이렇게 이원론적인 발상이 얼마나 지겹고 소비적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현태준 만큼은 여기서 출발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현태준의 작품을 단순히 미학적 일탈, 키치 혹은
탈/반디자인 등으로 풀기에는 어딘지 찜찜하다. 헤겔부터 시작해보자.
헤겔이 생각하는 예술은 예술 외적으로 있는 다른 목적의 수단이 아니라 예술 자체로서 어떤 근거를 확보해야
하며, 자유롭고 동시에 자유를 구현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헤겔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자유 그리고
진리와 동일시 될 수 있는 실체이다. 헤겔의 틀로 봤을 때 현태준의 작품은 비록 고전적인 전형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술이다.
또한 현태준을 칸트에 대입했을 때, 역시 '현태준은 예술이다'. 칸트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 어떠한 편견 없이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칸트의 아름다움이란 어디에도 구속당하지 않는 취미의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다.
철학자로서 칸트는 아름다움과 진리 혹은 정의를 구별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되는데 칸트는 아름다움을 관심이
없어도 마음에 드는 것 그리고 진리 혹은 정의란 인간이 추구하는 것으로 이 두 가지를 차별화 시킨다. 물론
현태준이 칸트에 세례를 받은 고급모더니즘과 대단한 순수주의와는 다르지만 칸트의 예술과 분명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태준의 '신식공작소'는 윌리엄 모리스가 꿈꾸는 '길드'의 형태와 유사하며, 지고지순하고 일방적인 그리고
고급 예술과는 다르기 때문에 대단히 민주적(!)이다. 그런 점에서 '현태준은 디자인이다.' 또한 현태준의
백그라운드도 디자인에 가깝다(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현태준은 공예를 했다). 그렇다면 현태준은 디자인이면서
예술? 예술도 아니고 디자인도 아닌 현태준?
다 아는 이야기지만 현대사회는 마치 예술과 디자인이 분열된 것처럼 정치, 경제, 예술의 담론이 분열 되어있다.
당연히 이 분열 된 사회의 주체들 역시 분열 되어있다. 정치의 핵심 담론이 평등인데, 경제의 효율성 담론으로는
정치의 평등이 설명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술의 담론인 자아실현은 정치와 경제로 설명될 수 없다. 이 말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주체는 이 세 개의 담론 영역을 관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 분열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태준은 예술의 핵심 담론인 자아실현, 곧 인간의 자율성으로 설명되고, 디자인의 타율성 혹은
수용미학으로 역시 설명된다. 동시에 현태준은 정치적/관습적 억압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평등을 제안하고
있으며, 신식공작소의 개념은 효율성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고, 동시에 자율성을 통한 자아실현을 추구하고
있다. 현태준은 정치, 경제, 예술을 관통하는 흔치않은 존재인 것이다.
현태준은 탈근대인 - postmodern subject - 이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반/탈 예술, 정치, 경제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혹은 그것들을 통합하고 있다. 드디어 대한민국에 근대를 뛰어넘은 사람이 탄생했다. '졸라 시바
부럽다'.
2. 졸라와 시바의 미학
근대인인 나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90년대 현태준과 같은 부류의 미학에 대해 심한 거부감(사실
고백하자면 시기와 질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분 나쁠 때마다 '이들의 감수성은 대중문화의 효과이며, 이는
자본의 재생산, 축적을 위한 대한민국 정치, 경제의 부산물이다'라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다. 역사의 죽음, 이념의
죽음, 창작의 죽음... 정신은 죽어버리고 육체만 덩그마니 남은 변종인간들. 이유 없이 유쾌한 무뇌아들. 유치함과
키치로 무장된 근대의 사생아들. 한국식 pop문화의 효과이든 혹은 진지하고 너무나 버거웠던 80년도에 대한
단순한 반동이든 이제 더 이상 이들의 정신과 육체에는 역사 혹은 이념의 흔적이 없다고 야박하게 군다.
그들에게는 배타적인 가벼움과 그 가벼움의 즐김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정치미학은 '졸라와 시바', '가벼움과
유치함'이다. '자족'이다. 현태준, 딴지일보, 최정화, 진달래, 황신혜밴드, 달파란 모두 이 카타고리에 있다. 나는 정말
지네끼리 희희덕 거리고 잘난 체하는 이들이 지겹다. 더 힘든 것은 이들이 새끼치는 문화적 유사품이다.
역사가 멈춰졌기 때문에, 일종의 의미 없는 탈역사 속에 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누구도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안에서
부유해야만 하고 마치 의미의 블랙홀 속에 있듯이 우리는 더 이상 진보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슬퍼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과 '졸라와 시바의 미학'을 오버랩 시키기도 한다. 다시 현태준의 작품을 본다. "참아봤자
소용없다 확실하게 반항하자". 일단 호흡을 가다듬자. 그리고 현태준의 이미지와 감수성을 차분히 읽어보자.
우리내부의 원초적인 그 무엇의 잠재가 본능이고, 욕망은 그것이 성취될 수 없는 것의 추구이기 때문에
욕망이라고 부른다. 물론 본능과 욕망은 편집적일 수도 있고 분열적일 수도 있다. 편집적인 욕망이 혁명가 혹은
파시스트의 에너지가 될 수 있고, 이들이 신봉하는 사회조직체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일 것이다. 동시에 분열적인
욕망은 자유주의적인 혹은 무정부적인, 마치 유목민과 같은 느슨한 소집단의 연결 같은 사회를 꿈꿀 것이다.
우리사회는 분열적인 욕망보다는 편집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다. 정치, 경제, 예술의 대한민국판 욕망은
편집적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혁명가와 파시스트의 사회다. 혹은 이런 부류만이 살수 있는
사회다.
현태준은 편집증적인 욕망대신에 분열적인 욕망이 더욱더 강한 것 같다. 현태준은 보편적인 것보다 개성적인 것을
선호하고 총체적인 것보다 분열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현태준, 딴지일보 등등의 아웃사이더들은 대단히
윤리적(반파시스트적인 것은 곧 윤리적인 것임)인데 이것은 이들이 역사(너무나 윤리적이었던 80년대의 역사)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나, 골수 리버럴, 여피들이 보여주는 빤빤한 구석이 이들에게는
없다(나는 이 윤리에 대한 집착이 가슴이 아프다). 누구는 이 '졸라와 시바'의 미학이 일본 복제판 혹은 미국
해적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역사 진행의 독특한 결과물이다.
'졸라와 시바'의 미학은 몸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노출(미니멀의 반대개념으로 맥시멀한)한다. 이것은 이 땅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뜻도 내포되어 있지만 이들은 이 노출자체를 정치적인 힘의 원동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볼 때 무의식의 욕망은 결핍, 문화, 제도 등에 의해 생성되며, 환원되며,
억압당한다. 결핍, 문화, 제도 등은 무의식에 어떤 형태로든 하중을 준다. 이때 사람들의 무의식은 활동적이고
생산적이게 된다. 왜냐하면 무의식 속에서 욕망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어떠한 식이든 결핍,
문화, 제도 등에 혁명적인 저항의 원동력이 되어 준다. 이러한 분열적인 욕망의 정치경제학은 바로 그 욕망을
생성한, 환원시킨, 그리고 억압한 결핍, 문화, 제도를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사회적인
구조가 생성되기 이전의 세계를 역할모델로 상상하며 자신들의 현재 위치에 대해 역사적인 피해의식을 갖는다.
나는 이것이 '졸라와 시바'의 핵심이자 상상의 정치경제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인류의 계몽, 사회의 구조화
이전의 원초적 본능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조와 제도 속에서는 사회정치적 억압과 거대한 기호들의 독재를
종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구조와 제도 밖, 상상 속의 영역이 이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영역이다.
위법, 일탈의 미학은 곧 '졸라와 시바'의 미학이다.
3. 현태준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미 있는 사회적 인간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호락호락하게 자신들을
무의미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꿈틀거리는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 지하철 속의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 택시 기사, 노동자, 학생, 심지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까지 심상치 않은 눈빛(현태준을 이 말이 무슨
뜻이지 알리라!)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을 의미 있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이러한 사람들을 철저히 사회와 격리시켰다. 정치가, 경제가, 그리고 문화가 그러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가지는 순간 의식/무의식적인 긴장감에 빠진다. 이러한 소외는
사람들을 억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소외시킨 사회에 대해 비사회적인 모습으로 항변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종종 무질서, 무의미, 비이성적인 행위로 이어진다. 소외 속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참여와 쌍방소통에 대한
의지와 요구는 여지없이 묵살 당했다. 그럴 때 이러한 의지와 요구는 언제나 비/반사회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단순한 양아치론 이나, 계급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식으로 현태준의 작품을 일도양단 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들을 견인의 대상인 대중이라고 생각할 때 '계몽주의'는 역사에 등장했고, 이성, 합리성, 도덕 등 우월과
열등의 절대 언어가 사람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그러한 역사를 믿었고, 나치가 그러한 세상을
추구했고, 아프리카의 선교사, 근대철학으로 무장된 교육제도가 이러한 공식을 수행한다. 역사의 주체와 객체가
선명하게 분리된다. 문화도 분리된다. 계몽의 대상들인 대중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대중은 민중이 되어 저항하기도
하고, 재즈, 록, 펑크, 하드코어, 엽기의 문화는 비록 자급, 자족적이지만 계몽적 유토피아에 일탈하며, 저항한다.
현태준의 작품은 위악의 배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현태준은 사회의 파시스트적 위선에 저항(그들의
표현대로라면, 똥침을 날리기 위해) 무질서, 무의미, 비이성적인 언어를 지신의 작품에 반영한다. 이것은 일종의
동질성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나누는 방식인데 사람들이 사회에 항변해서 위악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는
것처럼 현태준 역시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해서 위악적일 때가 많다. 대중적 허위의식? 일탈? 아나키?
물론 사회학적 용어인 '대중'들의 (허위)의식과 비사회학적 용어인 '사람들'의 (비)사회적 행위의 결과의 절대값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허위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는 대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오해한
것이다. 이것은 근대 철학의 결정적인 오류다. 마찬가지로 현태준의 작품을 고급문화의 미학적 스타일로
규정한다면 큰 오류다. 다시 현태준의 작품을 본다. 이 거대한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이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
현태준은 남근주의적인 위계질서, 제도적 틀거리, 도시 여피들의 역사적 이미지와 감수성에 대해 전복적인 시비를
건다. 현태준의 역사에 대한 시비는 치기, 유치함, 엉뚱함 등 발칙한 미학적 상상력을 그 근거로 가지고 있는데 이
상상력은 상당한 쾌감을 준다. 현태준은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 철없는 어린아이, 비사회적인 광인 등을 지지하며,
옹호한다. 특히 몽상가 현태준은 비사회적인 광인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이는데 구조의 거대한 기호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전형으로 그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태준의 진실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그래
현태준이 디자인이면 어떻고 예술이면 어떠랴. 내 근대적인 머리는 포맷이 필요하다.
엄혁(문화평론)
현태준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대 도예과를 졸업했다.
1994년부터 현재 운영하는 '신식공작실'을 설립,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과 다수의 재미있는 디자인 상품을 기획, 제작해오고 있다.
'쌈지' 등의 클라이언트와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디자인 프로젝트 그룹 '진달래'의 멤버이기도 하다.
6th vidak designer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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