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04. 10]英 디자이너 반브룩 방한
[속보, 연예/문화, 생활/문화] 2003년 04월 10일 (목) 21:18
"이번 이라크전은 역사상 그래픽 디자인의 영향이 가장 컸던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폭격을 퍼붓기 전 그래픽으로 가상도를 그려 보여줌으로써
전세계 언론과 시청자들을 미리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국면에서 한갓 그래픽 디자이너가 할 일이 무엇인가,
그는 질문은 그래서 더 시의적절합니다. 그래픽 디자인은 오늘날 미국 주도의
세계화로 치닫는 지구를 개선할 책임을 나눠 지고 있는 겁니다."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만난
조너선 반브룩(37.사진)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휴머니티의 문제를
다루는 또 다른 언어를 만드는 것이 내가 디자인을 하는 까닭"이라고 밝혔다.
영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계를 대표하는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반브룩은
왕립예술학교를 다니던 10대 시절부터 실험적인 서체(타이포그래피)와
장정(북디자인)을 선보여 '도발적인 디자이너''반(反)미학적 디자이너'란
평판을 얻었다.
현재 런던 소호에 작업실 '바이러스'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이날
'언어는 바이러스다'란 제목의 공개강좌에서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강력하게 사람들을 전염시킬 수 있는
소통의 그래픽 디자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정치와 디자인을 연결시키지 말라는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상업광고와 제품디자인 등에서 사람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그래픽 디자인을 어떻게 정치와 떼어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합리적으로 대하며 의미있는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 디자인입니다.
환경을 악화시키는 기업, 사회 전반을 망가뜨리면서 돈벌기에 혈안이 된
기업들의 그래픽 디자인 제작을 거부하는 것이 첫걸음이 되겠지요."
반브룩은 다국적기업인 코카콜라의 일감을 한마디로 거절해 화제가 됐던 얘기 끝에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세계화에 따른 폐해를 불식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과 협력하며 할 일이 굉장히 많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부터 진행하고 있는 '북한 디자인 프로젝트'로 한반도에 관심이 많은
그는 "사람들이 북의 김정일을 욕하지만, 나는 요즈음 텔레비전에 나와 떠드는
부시를 보면 그가 김정일 못지 않은 독재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마디를 날렸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